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스카마호 선상 살인 사건 (문단 편집) == 여담 == * 사건 당시는 한중수교 초기라 [[조선족]]에 대한 인식이 동포라는 이유로 호의적인 편이었으며[* 정확히는 한국의 나쁜 사장들에게 착취당하는 '약자'의 이미지였으나 이후 조선족이 늘어나면서 [[수원 토막 살인 사건]] 등 조선족이 엽기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여럿 발생함에 따라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특히 [[중화사상]]에 입각한 [[패권주의]]식 외교를 내세우는 [[시진핑]]이 집권한 후에는 '적국'을 옹호한다는 인식까지 확산되면서 인식이 더더욱 나빠졌다. 사실 옹호 여론은 국적과는 그다지 상관 없다. 이 사건의 동정 여론은 선원들을 [[가해자가 된 피해자]]로서 받아들였기에 생긴 것이지 만약 이들이 오원춘처럼 단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했다면 딱 오원춘만큼 욕을 처먹었을 것이다. [[한강 몸통시신 사건]]의 가해자 [[장대호]]도 오원춘마냥 선량한 여성을 성폭행한 뒤 잔혹하게 죽였다면 딱 오원춘만큼 욕을 먹었을 텐데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반말에 신체적 폭력까지 온갖 능욕을 당했음에도 투숙비라도 내면 참고 넘어가려다 먹튀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폭발했다고 주장했으므로 페스카마호 가해자들과 유사한 면이 있다. 물론 그가 저지른 [[토막살인]]은 끔찍한 중범죄가 맞다.] 당시 시대상 선상 폭력이 일상이었다[* 아마 바다일 하는 사람 중에는 먼 바다에서 살해당한 뒤 조용히 사고로 묻힌 사람도 많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인식이었고, 불행히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1991년 국회 [[국정감사]] 때 선상폭력문제에 관련된 보고에 의하면 90년부터 불과 1년 반 사이에 해상사고로 인한 사망·실종자가 무려 500명 이상이었으며, 심지어 대부분은 '''사인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원이 선상폭력을 고소해도 선장이 구속되거나 처벌받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는 점이 동정을 사 사회 분위기는 이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사실 당시는 [[베트남 전쟁]] 등에 대해서도 한국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반성해야 된다는 여론이 이념을 가리지 않고 국민 다수에게 있던 시대였고 여러 면에서 한국의 잘못도 인정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것이 2010년대 이후에는 [[국뽕]]과 [[국까]], [[우월감]]과 [[열등감]]이 섞인 유사 [[내셔널리즘]]으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들이 아닌 살인자들에게 전국에서 성금이 답지했고 어느 독지가는 당시 돈으로 2천만원을 희사할 정도였다. 단 비난 여론이 생기자 그 돈은 반환되었다. 미궁에 빠질뻔한 사건을 밝혀내고 범인들을 검거하게 한 1등 항해사는 피해자임에도 폭력 가해자로만 알려져 숨어 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 사형제의 완전 폐지를 목표로 하고 있는 [[국제앰네스티]](AI)는 1심에서 모두가 사형 판결을 받자 [[김영삼]] 대통령 앞으로 보내는 서한을 통해 "페스카마호 살인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조선족 선원 6명의 형량을 감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이들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며, 희생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이해한다"면서도 "사형제도가 본질적으로 부당한 형벌인만큼 이들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감해 주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동시에 "조선족들은 배 위에서 심한 폭행과 협박을 당했는데, 이러한 상황이 참작되었으면 한다"고 했다.[[https://www.sarangbang.or.kr/hrdailynews/59692|#]] * 범인들의 부인들은 대부분 원래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가족을 면회하러 외국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사실상 [[이산가족]]이 되어 생이별하는 처지에 놓였으나 사형수 교화 담당을 맡은 [[승려]] [[삼중(승려)|삼중]]의 도움으로 다 함께 대한민국을 방문해 남편을 [[면회]]할 수 있었다. 이때 에피소드가 있는데 한 무기수의 아내가 삼중에게 ‘부탁이 있다. 내 남편이 무기로 15년을 삽니까? 그럼 __제가 함께 살면 2명이니 7.5년만 살면 되지 않는가?__’ 라고 했다는 것. 글자 그대로 법을 정말 전혀 몰랐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못 배우고 어려운 집안 출신인지를 알 수 있다.[br]그러나 중국으로 돌아가는 출국 날 공항에 나오지 않고 잠적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전재천의 부인이었다. 돈을 벌어 오던 남편이 감옥에 처박혀 경제 활동을 전혀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으니 고향에 쌓인 빚을 갚고 자식들의 학비를 마련하려 자신이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당연하지만 [[불법체류자]]다. 1년 후 그녀는 다시 삼중을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대전의 식당에서 일하는데 다리가 아파서 서 있기도 힘들건만 철없는 막내아들은 돈 부치라는 전화만 한다고 서럽게 울었다고. 괴로워서 술로 사는 등 많이 흔들리는 그녀를 보고 삼중 스님이 안타까운 마음에 돈 몇 푼을 손에 쥐어 주었더니 그 돈으로 술을 먹더란다... 얼마 후 그녀는 교도소로 [[이혼]] 서류를 보냈다. 그 이유는 한국인과 [[혼인신고]]를 하여 한국 내 자신의 체류 신분을 보장받기 위해서(...). 삼중은 내심 그녀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내 입장에서는 자기를 무척 사랑하는 남편이었다지만 돈도 못 벌어오는 흉악범 사형수 따위는 가족에게 짐만 될 뿐 필요없으니 버린 것이다. 전재천은 울면서 도장을 찍어 줬다. 이후 몇 달간 어찌나 많이 울었는지 시력이 악화되었고 눈 수술을 여러 차례 했지만 거의 실명 상태로 전락했다. 전재천의 아내, 아니 전처는 연락도 끊어 버렸다. 삼중에게 전화해서 단호하게 ‘앞으로 나에게 전화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고.[br][br]그래도 삼중은 계속 전재천의 가족을 도왔다. 그의 두 딸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부 학자금을 지원했다. 큰딸은 [[의사]], 작은 딸은 고등학교 [[일본어]] [[교사]]가 되었다. 2006년 딸 둘이 합동[[결혼식]]을 했는데 각각 50만 원짜리 금목걸이를 만들어 결혼 선물을 전해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역시 지원해 주었다. 전재천은 갚겠다고 했지만[* [[사형수]]는 미결수이므로 경제사범들과 한 방에서 생활한다. 돈이 있는 경제사범들은 간혹 그들을 불쌍히 여겨 사형수에게 영치금을 종종 넣어준다고. 전재천은 돈이 모아지기만 하면 몽땅 중국에 송금했다. 삼중에게 갚을 돈도 이런 식으로 모으겠다는 뜻.]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고 한다.[[http://dj.breaknews.com/sub_read.html?uid=13302|삼중 증언- 편지 500통 보내온 선상반란 조선족사형수]] * 전재천은 "석방이 된다면 조선족을 위하고 남북통일을 위해 있는 힘 다할 것"이라고 밝히며 "20년을 살았다. 출소시켜 달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담당 변호사 조봉은 "한국에서 무기수들이 20년 이상 형을 산 전례가 없다"[* 사실이 아니다. 2009년에 보도된 바로는 당시 20년 이상 수감 중인 무기수가 70여 명이었으며 23년이 9명, 24년이 5명, 25년이 1명, 1982년부터 27년이나 지난 1명까지 있었다.]면서 전재천 등 6명의 출소를 강하게 주장했다. 삼중 스님 역시 '인도적 차원에서 고국으로 돌려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중국 교도소에서 살게 하는 식으로 추방 조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승조원에 의한 선상 폭력 사건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있다. 논란을 우려한 선사와 업계에서는 쉬쉬하는 분위기이며 관할권 문제나 수사의 어려움 등을 핑계로 정부도 강건너 불구경 식으로 방치한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원양어선과 화물선 선원이 거의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로 채워졌기 때문에 문제가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